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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농부 홍순영
농부 홍순영
홍순영 사진1

농부 홍순영

홍순영. 1958년生. 구례군 광의면.

“그 유명한 58년 개띠시네요. 객지로 나가신 적은 없습니까?”

“군대도 안 갔는데 객지로 나갈 일이 없었지요.”

“군대는 왜?”

“초등학교 밖에 안나왔슨께 그라지요.”

농부 홍순영은 구례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구례 땅에서 살고 있다.

구례와 농사 외의 가능성에 대해 그는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는 사람인 듯 단호했다.

“부모님도 구롓분이시겠네요.”

“그러지요. 이곳 광의에서 사셨습니다.”

“형제분은 어떻게 되십니까?”

“아홉입니다.”

“아홉요! 어떻게 됩니까?”

“오 남 사 녀지요. 저는 여덟째고요.”

농부 홍순영은 부모님으로부터 270평 논을 증여받은 것이 전부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대처로 나갔다.

17살, 지금으로 보자면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나이부터 마을 정미소를 운영했다.

임대로 운영한 것인데, 당시에는 발동기로 작동하던 시절이었다.

“정미소는 언제까지 하셨습니까?”

“6년 계약하고 8년 정도 했지요. 그라고 2년 쉬다가 다시 2년 더 했을 겁니다.

서른 살 무렵일겁니다.”

“왜 그만 두셨습니까?”

“정부수매를 하니까 더 이상 마을 정미소는 필요가 없어졌지요.

통일벼, 유신벼, 뭐 그라던 시절이었슴돠.”

“벌이는 좋았습니까?”

“정미소 딱 2년 하고 논을 두 마지기 샀습니다. 제 나이 열아홉에 처음으로 땅을 샀지요.

마흔 될 때 꺼정 서른 마지기(6000평) 장만하고 큰 머슴, 작은 머슴 두고 사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저 일 많이 했습니다.”

정미소에서 쌀을 도정하면 읍내 장터 ‘되질하는 사람’에게 넘겼다. 경운기에 싣고 장으로 나간다.

그때는 쌀 한 가마니에 85kg이었다고 한다. 경운기에 서른 가마니를 싣고 나간다. 운반비용으로

쌀 주인에게 가마니 당 천오백 원을 받았다고 한다.

홍순영 사진2
홍순영 사진3

“서른 개니까 천오백 원 곱하기 서른 하면 솔찮은 돈이잖아요.

그렇게 돈을 모으면 땅을 샀습니다.”

결혼식은 1986년 1월 1일 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로 올렸다고 한다.

살림은 83년부터 차렸다고 한다. 왜 결혼식이 늦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집사람은 중학교 꺼정 나왔습니다. ‘나같이 못난 놈하고 살것냐’ 하고 물었지요.”

“중맵니까?”

“아닙니다.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얼마 전에 뭔 일 끝에 그랍디다.

‘나는 당신 만나 가꼬 후회되는 일 한나도 없었다’

미안하고 고맙지요.”

그의 농장 이름은 <순영농장>인데 아내 서순자와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부부는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당연하기도 하고 의외인 것은 농부 홍순영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의 자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넷째 딸 홍진주는 산림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순영농장>의 곳간지기다. 아들 홍기표도 한국농수산대학 과수학과를

졸업하고 함께 농사를 짓는다. 감나무를 책임지고 있다.

<순영농장>은 사만 평 정도의 논농사와 감, 매실, 고추, 감자…

모두 해서 대량 오만 평이 넘는 농사를 짓고 있다. 시즌이 시작되면 부부와 두 전업농 자식들

이외에도 거의 모든 딸과 사위들이 일손을 돕는다. 그래서 가능한 농사다.

 

서른아홉 무렵이었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지을 무렵인데 그는 몹시 아팠다.

“여름 수도작 농약치고 나서부터 그랬지요. 쓰러진 것이지. 글고 알르지가 생겼습니다.”

이른바 녹색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석유로부터 농약과 제초제, 화학비료를 추출하기 때문이다.

식량 증산은 비약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피해도 막심했다. 수십 년간의 화학제재 살포로 인해

땅과 강이 죽어갔다. 더 이상 밥만 먹는 것으로 모든 것을 눈 감을 수 없는 상황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안온해야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농약으로 쓰러진 이후 그는 화학농약은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사람 잡는 일이란 것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농약 안하는 농사 짓는 거 터득하느라 첨에는 충북 괴산까지 견학을 다녀왔슴돠.

오도바이로. 뒤에는 기술센터 통해서 교육이라는 교육은 모두 받았습니다.”

2000년 들어서 완전한 무농약으로 전환했다. ‘환원순환농법’이라고 한다.

땅에서 난 것들로 땅에서 키우는 모든 일을 조절하는 농사짓기다.

지천으로 늘린 풀들이 홍순영 농사의 보물들이다. 채취한 풀들을 절삭해서 탄화기에 넣고

그 액을 추출한다. 화학농약과 비료 대신 홍순영은 이 제재를 농작물에 뿌린다.

그는 직접 퇴비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쌀겨, 소똥, 깻묵 등을 혼합해서 만든다.

그의 쌀농사에는 이것에 우렁이가 더해진다. 그가 짓는 농사는 땅에 해로운 일이 없다.

땅에서 난 것들을 땅으로 되돌려 주는 농사짓기이기 때문이다. 농부 홍순영은 지금까지

백여 종의 순환제재를 만들었다. 환삼덩굴은 항균, 살균 작용을 한다. 칼슘 역할도 한다.

산죽, 일명 조릿대 역시 살균살충 작용을 하고 마그네슘을 공급한다. 담배, 잎이 아닌

대를 이용한다. 구례에는 없고 장수에서 가지고 온다.

니코틴 성분을 추출해서 충해를 방제하고 땅 속의 선충을 잡는다. 쇠비름, 질소 함량이

높고 전착제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감의 색을 곱게 만든다. 자리공은 독성이 강하다.

살충, 살균 역할을 한다. 옛날에 ‘사약을 받아라!’ 할 때 그 약재다.

그리고 은행, 녹차, 자소, 자귀… 끝이 없다.

그의 쌀에서는 오메가-3(리놀넨산)이 검출된다. 한국식품연구원에 성분 분석을 의뢰한

결과 오메가-3 성분이 5.4 ~ 9.1mg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오메가-3는 인체를 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필수 지방산으로 대부분 고등어 등

어류를 통해서 섭취하고 있다.

 

지난 2012년에 특허 출원한 ‘오메가-3’ 쌀 재배방법이 2014년에 특허청으로부터

특허 등록을 통보 받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땅을 믿고 땅에서 난 것을 땅으로 되돌려

주니 생긴 결과다. 그의 ‘영농일지’다. 글씨가 또박하다.

친환경인증을 받은 농부들은 영농일지를 의무적으로 작성해야 한다.

그렇기도 하지만 그의 일상은 온통 농사에만 집중되어 있다.

홍순영 사진4
홍순영 사진5

항상 기억하고 기록하고 실험하는 농부다. 교육 받고 교육 시키는 시간이 여간한 것이

아니라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그는 거의 대부분의 영농교육에 강사 또는 학생으로 참여한다.

“아무리 안다고 해도 가서 듣다보면 한 가지라도 얻고 그라지요.”

“곡식이 내가 지들한테 한 번 나갔는지 두 번 나갔는지 시 번 나갔는지 압니다.

수입쌀은 훈증소독해서 수입됩니다. 갸들이 비행기 타고 오는 거 아니잖습니까?”

농부 홍순영은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진 초등학교 나온 박사농부다.

그는 여전히 사람과 자연에 이로운 농법이 있다면 달려가서 배운다.

그는 여전히 농사 짓는 바보지만 농사를 통해서 세상의 많은 일들을 하나로 엮어 가고 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농부다.

농부 홍순영은 한 사람이 아니다.

홍순영과 서순자 그리고 여섯 명의 아이들이 모두 ‘농부 홍순영’이다.

그들은 땅에 발을 딛고 몸으로 살아가는 가족이다.

원래 최초의 가족은 그러했다.

 

www.jirisan.com과의 인터뷰 중에서 –